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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빛의 과거

저자 : 은희경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 2019-09-02

책소개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한국 문학의 빛나는 고유명사, 은희경의 신작 『빛의 과거』가 출간되었다. 『태연한 인생』(2012)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깊이 숙고해 오랫동안 쓰고 고쳤다. 2017년의 ‘나’는, 작가인 오랜 친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1977년 여자대학 기숙사에서의 한때를 떠올린다.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서로가 기억하는 ‘그때’는 너무나 다르다. 

은희경은 갓 성년이 된 여성들이 기숙사라는 낯선 공간에서 마주친 첫 ‘다름’과 ‘섞임’의 세계를 그려낸다. 기숙사 룸메이트들을 통해 다양하며 입체적인 여성 인물들을 제시하고 1970년대의 문화와 시대상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무엇보다 회피를 무기 삼아 살아온 한 개인이 어제의 기억과 오늘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민낯을 직시하여 담담하게 토로하는 내밀한 문장들은, 삶에 놓인 인간으로서 품는 보편적인 고민을 드러내며 독자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은희경’이라는 필터를 거쳐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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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 : 은희경 (Eun Hui Gyeong,殷熙耕) 
  
1959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했고 전주여고를 거쳐 숙명여대 국문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과 내면적 상처에 관심을 쏟는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여 젊은 작가군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등단 3년만인 1998년에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 수상하면서 소설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국문학번역원 비상임이사(제4대, 임기3년), 문화관광부 한국문학예술위원회 문학위원회 상임위원, 미국 워싱턴대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목차

리뷰

그때 그 여자들, 
사적이며 공적인 ‘나’의 이야기
이야기는 중년 여성 김유경이 오랜 친구 김희진의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게 되며 시작된다. 대학 동창인 그들은 “절친하다거나 좋아하는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고 “끊어진 건 아니지만 밀착될 일도 없”는, 어쩌다 보니 가장 오랜 친구가 된 묘한 관계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으나 전혀 다르게 묘사된 김희진의 소설 속 기숙사 생활을 읽으며, 김유경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는다. 

기숙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룸메이트다. 타의에 의해 임의로 배정된 네 명이 한 방을 쓰는데 ‘임의’의 가벼움에 비해 서로 주고받는 영향은 터무니없이 크다. 국문과 1학년 김유경의 322호 룸메이트는 화학과 3학년 최성옥, 교육학과 2학년 양애란, 의류학과 1학년 오현수다. 최성옥과 절친한 송선미의 방인 417호 사람들(곽주아, 김희진, 이재숙)과도 종종 모이곤 한다. 

1977년의 이야기는 3월 신입생 환영회, 봄의 첫 미팅과 축제, 가을의 오픈하우스 행사 등 주요한 사건 위주로 진행된다. 김유경의 서사가 굵직하게 이어지는 사이사이, 322호와 417호의 룸메이트인 일곱 여성들의 에피소드도 다채롭게 전개된다. 그들은 각자 “성년이 되어가는 문으로 들어가” “낯선 세계에 대한 긴장과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자기 인생을 만들어”간다(2016년 작가 인터뷰). 김유경은 말더듬증이라는 약점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내리누르며, 말과 행동이 필요한 순간 입을 다문다. 회피를 방어의 수단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세상의 어중간한 어디쯤에 위치시키려 한다. 한편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취향을 조용히 발전시키는 오현수, 남을 끌어내려 항상 주인공이 되길 바라는 김희진, 그와 비슷하지만 남의 눈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욕구 충족이 중요한 양애란이 그렇다. 지향점과 실제의 삶에 괴리가 심한 사람도 있다. 최성옥처럼 자신이 선택한 남성에 의해 그 괴리가 발생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교정하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매사 주요하게 지적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발을 헛디뎌버리는 곽주아 같은 경우도 있다. 그들은 “치졸하고 나이브”(「작가의 말」)하며, 소탈하기도 섬세하기도 하다. 선량하고도 얄미우며 까칠하면서도 유약하다. 마치 오늘의 우리처럼. 

여러 문학평론가가 언급하듯, 한국 문학이 어떤 ‘인물’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근원적인 고민을 드러낸다고 할 때 많은 경우 그 ‘인물’ 앞에는 은연중 (남성)이라는 괄호 속 함의가 있었다. 여성들은 문학 속 ‘(남성) 인물’에 젠더를 교차해 자신을 이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의 경험에 중실한 입사 이야기initiation story”(신형철)인 『빛의 과거』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이입의 거리를 좁힌다. 그렇기에 “은희경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한국 현대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된다. “나와 닮은 목소리”(정세랑)로 쓰인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내 얼굴과 닮아 있는 소설 속 그들의 안부를 묻게 되는 것이다. “그 많던 여성 대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고요서사 차경희). 

지금 눈앞에 도착한 기억의 빛
‘미지를 통과해 이제야 내게로 도착한 빛이었다’
『빛의 과거』에는 1970년대의 정치·문화적 시대상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때 학생들은 독재 정권에 맞서 전단을 돌리고 어용 총장 임명에 항의해 검은 리본을 달았다.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구금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김유경은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지만, 매사에 튀지 않고 나서지 않으며 한 발을 빼는 그의 삶의 방식 역시 돌고 돌아 시대 상황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김유경이 ‘모범’ 혹은 ‘평범’이라는 태도를 걸치기 시작한 큰 원인은 말더듬증이다. 군사 훈련을 연습하는 수업인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구령 외치기를 강요당하고부터 말더듬증 트라우마가 강화된 것으로 미루어보면, ‘회피’라는 수동적 처세 방식은 오롯이 김유경 개인의 나약함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닐 듯하다.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p. 245). 

어길 수 없는 명령이 주어지고 그에 따르지 못하면 마땅히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시대의 폭압은 소설 곳곳에 공기처럼 배어 있는데, 지방 도시 출신인 김유경이 고속버스터미널에 귀향 표를 예매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을 때의 경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수리 위로 대나무 장대가 수평으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며 머리통이 솟아오르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조금이라도 허리를 폈다가는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가리지 않고 머리통을 맞아야 했다. 그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위치를 바꾸라고 명령하면 군대에서 기합을 받듯이 무릎걸음으로 움직였다”(pp. 243~44).

한편, 풍부하게 묘사된 문화적 풍경은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맛동산과 인디안밥과 티나크래커, 밀감’을 차려놓은 입사 환영식에서부터 ‘알릿사’ ‘롯데’ ‘베르테르’ 같은 세계문학 속 남녀 주인공 이름을 적어 미팅 파트너를 정하는 방식, 카세트플레이어로 듣던 에프엠 방송 「밤과 음악 사이」와, ‘대학가요제’ ‘싱어롱 다방’ ‘음악감상실’, 찻집 〈로터리 다방〉〈가무〉, 경양식집 〈세실〉, 〈은파여관〉 등 시대를 대표하는 고유명사들을 포함한 은희경 특유의 세심한 ‘디테일’은 그 시대를 직접 겪은 독자들에게는 물론이고 겪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는 듯한 사소하고 정겨운 기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휴대전화가 없던 그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2백 명 넘는 기숙사생의 연락을 책임지던 ‘귀한 전화’에 나만을 위한 연락이 걸려오는 일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은희경 문장의 힘 덕분이다. 

1977년 발사된 보이저호에 실린 디스크에는 “혹시나 만날지도 모르는 외계 생명체를 위한 지구의 자기소개서”(p. 161)가 들어 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환영 인사말, 당시 유행하던 노래와 보들레르의 시, 지구의 사진 등이 포함된 이 음반의 이름은 ‘지구의 목소리’다. 인간에게서 떠나 가장 멀리까지 간 보이저호에 실린 ‘지구의 목소리’처럼, 『빛의 과거』를 기억을 되짚으며 오늘의 나에게 안부를 묻는 은희경이 기록한 ‘어제의 목소리’라고 불러볼 수도 있지 않을까. ​